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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나라살이/필리핀이야기

필리핀 그 이후

 

“엄마 언제 왔어요?”잠에서 깨어난 인태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봉석씨도 날 보고 긴장을 내려놓았는지 아프기 시작했고 나도 그제야 발바닥 통증이 걷기 힘들 정도라는 것을 인식했다. 명절과 집안행사로 마냥 쉴 수 없는 형편인데도 난 계속 졸았다. 몸은 한국에 돌아왔는데 머리와 마음은 아직 필리핀에 두고 온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난 계속 나를 평가했다. 이번 여행은 목표를 달성 했는지, 현지에 있으면서 일정이 틀어질 때 난 제대로 판단을 한 것인지, 함께 한 친구들과 관계에 있어 내 역할을 잘 한 것인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다시 복잡해 졌다. 또 다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잘 안 풀렸던 게 생각나고, 부족했던 준비가 많이 아쉬웠고, 내 리더십이 의심스러워졌다. 이 교수님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하기까지. 내가 단순히 필리핀에 즐기러 다녀온 것이 아니었기에. 내 마음 저 편에 누군가가 자꾸 이야기 한다. “너 그거밖에 못해? 내가 너한테 얼마나 기대했는데 이렇게 실망시켜도 되는 거야?” 부족했던, 또 준비에 게을렀던 내 모습이 떠올랐고 난 다시 부끄러워 숨고 싶어졌다.

 

“한계가 분명히 있었잖아. 너무 자책하지 마. 애들 데리고 처음 다녀온 거잖아. 우리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잘 해야 한다는 잘못된 리더십이 학습되어졌잖아. 그런데 혼자서 완벽하게 해봐. 그럼 다른 사람들은 함께 할 수 없는 거잖아. 스스로가 최선을 다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들이 있다면 함께 한 사람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되잖아.”

 

“그렇지? 내가 이러면서 또 도망치려 하는 건가?”

 

여행 후 열흘 만에 이교수님 댁에서 우리는 다시 모였다. 그리고 서로 여행 이야기를 하다 문득 중학교 3학년의 나를 만났다. 해마다 진행되었던 여름캠프가 있었다. 그리고 캠프 마지막 날에는 3학년들만의 파티가 있었다. 다만 그 해 우리가 파티를 하고 있는 사이 후배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순식간에 캠프 마지막 날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다. 당시 회장이었던 난 선생님께 불려갔고 혼났다. “너 그거밖에 못해? 지금 이 상황이 너한테는 안보여? 네가 판단을 잘 했어야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기대했는데 이렇게 실망시켜도 되는 거야? 지금 다른 선생님들도 너한테 실망했다고 얼마나 말하고 있는지 알아?”파티는 끝났다. 이 모든 혼란은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난 내 스스로 너무 무능했고 아무 쓸모없게 느껴져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어떻게 죽으면 될까? 생각하다 이렇게 자살을 하게 되면 날 키워 준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 같아 죽지도 못했다. 다만 그날 이후 나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이 비난으로 느껴졌다. 그 시선이 무서웠다. 이 기분과 느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난 그냥 조용히 침묵하며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내가 나서는 건 또 다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대학 다닐 때 또 해외봉사활동 리더를 한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도 참 힘들었었다. 여행 마지막 날을 정리하며 나눔을 하다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참 힘들었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바로 함께 자리했던 선생님께 혼났다. “리더가 되어서 이 자리에서 네가 지금 그런 소리나 할 수 있어? 그런 건 혼자 알아서 해야지. 왜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난 내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리고 난 마음을 닫았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교수님 부부와 다과를 나누며 혜원, 인표, 정현은 여행 이후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들의 모습은 희망적이었다. 또 다른 꿈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내 마음도 설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닫았던 문을 열고 싶어졌다. 마치 내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너무 어렸었잖아. 혼란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도 또 혼자만의 책임이 될 수가 없어. 짐이 무거우면 옆에 사람에게 나눠들자 부탁해야지. 서로 여력이 되는 만큼 나눠들고 가면 되지 않겠어?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네 옆에 네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친구들이 있잖아. 함께 가자. 함께. 힘들면 잠시 쉬면서. 함께.’

 

이제는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고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보다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나를 비우고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더 힘차게 발을 내딛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