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만골을 찾아가기 전에 보고 간 신문기사 (김세진 선생님 소개)
- 한겨레, 가난한 이들의 ‘물만공동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65442
- "재개발 우리손으로" 달동네의 꿈 영글어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401/h2004012718534038120.htm "어디나 문 열려 있으면 들어가서 놀다 오고 밥 때 되면 한끼 밥상에 같이 어울려 먹고 하는 이웃의 개념이 살아있는 곳이다. 비록 누추해도 집 걱정이 없다보니 소득은 낮지만 살림이 크게 힘든 줄도 모른다. "
- 성미산, 물만골을 만나다 http://h21.hani.co.kr/section-021110000/2004/12/021110000200412090538044.html
그리고, 4년이 흘러 지난 토요일 다시 실린 물만골 기사,
- 주민세상 꿈꾸는 ‘대안 개발’ 온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332666.html
#1.
2월 24일, 오후 6시.
시청역 4번 출구에서 조금 걸어 탄 마을버스 1번.
물만골 공부방 찾아간다 하니, 내릴 때 말해주겠다는 기사 아저씨.
마을버스는 골목 골목 빙 둘러 가더니, 갑작스레 오르막길을 마구 올라간다.
올라가는 버스 앞에 1톤 트럭 한 대가 느릿느릿 가자
"와 빨리 안 가고 꾸물꾸물하노" "에이씨, 뭐고 저거" 하는 마을 버스 승객과 기사 아저씨.
조금 뒤,
"저거 장씨 아저씨 차 인갑다"하는 한 할머니 목소리.
그 말이 끝나자 이내 사그라드는 불평불만의 웅성임. 머릿 속에 문득 드는 생각.
'동네 아는 사람 찬데, 불평해봤자 뭐 하나...'
#2.
오후 6시 10분. 물만골 도착.
어느덧 해는 넘어가, 비탈진 마을에 온기를 비추지 않는다.
저 멀리 시야에 부산 시청이 있는 번화가의 네온싸인에 불이 하나하나들어오는 가운데, 회색 콘크리트 낮은 집, 군데군데 파란색, 회색 슬레이트 지붕이 가득한 물만골.
#3.
여기서부터 사진기를 집어넣었다.
'이만큼이면 됐다. 공부방을 찍으러 온 것도 아니고 난 그저 배우려고 들으러 왔을 뿐'
골목을 돌자 롤러스케이트 타는 아이, 달리기 시합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공부방 오셨죠?" "응, 맞아요." "수녀님 조금 있음 오니까,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공부방 손님 맞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문득 철암 생각도 났다.
곧 돌아오신 아가페 수녀님.
6시반부터 저녁식사 시간이란다.
수저를 가져다 주는 아이, 반찬을 나르는 아이 자연스럽다. 또 철암 생각이 났다.
#4.
수녀님과 안쪽 방에 앉았다.
무얼 듣고 싶냐 하시기에 기존에 찾아봤던 자료들을 보여드렸다.
물만골이 어떻게 이런 촘촘한 마을 관계를 만들어나갔는지, PPT 자료나 기사에서 보았던 일들이 지금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말씀드렸다.
http://blog.daum.net/sallim-worker/25 에 있는 첨부파일
그러나 수녀님 말씀은 너무도 달랐다.
간단히 말해, 언론을 통해 외부에 비친 물만골의 이미지는 현재 '거짓'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녀님 말씀을 처음부터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웠다. 기존의 기대가 있었으리라)
물론 예전에 신부님이 공부방을 꾸려가며 일했을 때 잠깐이나마 그런 적은 있었지만
마을 대표, 마을 위원장을 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그와 친한 지도자들의 부정과 비리가 마을을 반토막 냈다는 것이다.
링크된 글의 PPT를 참고해보면 나오는 사업들인
'음식물 쓰레기 자원화 사업', '닭 사육장 및 토끼 사육장 설치', '자원 재활용 사업', '의류 봉제사업' 중 실질적으로 된 사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프로젝트들을 위한 지원비를 시청, 구청으로부터 따고 난 후 받은 돈을 지도자 몇몇이 나눠가지는 행태가 반복됐다는 것이다.
'닭 사육장 및 토끼 사육장 설치'는 그 앞 집 어떤 아저씨가 잡아먹는 개인 소유가 됐고 '의류 봉제사업'을 했던 어머니는 200만원만 지원받고 나머지는 모두 자신이 꾸렸지만, 그 이후의 일감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수녀님 말씀은
전 위원장이었던 사람이 개인적으로 공부방 인건비를 횡령하다 그것이 발각되어 예전에 계셨던 신부님과 갈등을 빚었고 이 일로 인해 신부님은 마음이 떠난 마을을 떠나셨는데
그 이후의 마을 위원장을 해온 사람들이 사실상 한 편이라 그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최근 재개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조명되면서 98년 물만골이 도로개발에 주민들이 합심하여 대처한 방법이 주목받았다.
물만골이 마을 공동의 땅을 사는 방법은 예를 들어, 50평의 땅이 나오면 마음 있는 마을 사람이 10평, 5평, 20평 이런 식으로 땅을 사들여서 지분만 인정하는 공동소유의 방식인데
사실 이 조차도 여건이 되는 사람들만 계속 사게 되면서 마을에 분란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지금 위원장이란 사람은 2007년에 측근 몇몇과 함께 마을 사람들 몰래 마을 땅을 꽤 많이 사들였는데
위원장이 본업과 관련해 마을에 없는 동안 측근의 말실수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조사를 해서 밝혀지는 바람에 엄청나게 시끄러웠다고 했다.
그 때 위원장이 그런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결국 마을 일을 할 만한 다른 사람이 없으니 측근인 몇몇 사람들이 마을위원장 선출 때 '옳소! 옳소!'하는 식으로 연임을 시키고 있는 상황인데,
이 위원장을 하는 사람은 부산 시내 중심가에 성형외과를 두 개 꾸리고 있고
수녀님이 명함을 보여주시길래 보니 한 명함에 직함만 4개(병원, 여행사, 물만골 운영위원장 등)인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1인 4역의 인물이었다.
느낌만으로도 물만골과 어울리진 않았다. 수녀님 말로는 장차 물만골에 복지병원을 차리려는 야심을 가진 이라고 했다.
(PPT에 있는 마을 시설 설치 계획 참고)
* 참고로 현재 하고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또한 물만골이 외부에 알려지기론 담이 없고 쓰레기가 없는 마을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소문일 뿐이지 이웃간에 왕래는 거의 없다고 하셨다.
사실 오가는 길을 살펴봐도 길가에 쓰레기는 어느 동네 마냥 아주 흔하게 발견할 수 있었고
찾아갔을 당시에 수녀님이 후원받은 쌀을 전해주러 가시다가 다른 동네 사람들이 눈에 띠자, 밤에 다른 사람 몰래 가져다 줘야 말이 안 나온다며 발길을 돌리셨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 갖다주라는 그런 인정은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물만골이 그렇게 가난하지만도 않다시며,
이 골목골목 집들만 봐도 차가 없는 집이 거의 없고 외제차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라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중 어려운 이들에게 무언가 나누어주려고 하면 뒷말들이 끊이질 않는다고 했다.
또 최근까지 물만골 출신 아이들이 자라나 대학생이 되어 자원활동을 하러 오기도 했지만, 이번에 대학생 되는 친구들이 없고 기존에 했던 친구들은 직장을 가지고 일하느라 올해는 힘들 것 같다는 수녀님 말씀...
가슴아픈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줄이자면
두 동강 나버린 마을, 활기를 잃은 마을, 끼리끼리만 나누는 마을이 물만골인 것이었다.
수녀님은 제발 마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조직화니, 프로젝트니, 무슨 마을이니 하며 일을 벌여 분란 좀 그만 일으켰음 한다고 하셨다.
(27일도 마을 운영위 회의가 있어 위원장이 직접 찾아와 참석해달라 했지만, 그 위원장이 마을 위원장으로 들어선 뒤로는 안 가신다고 수녀님은 말씀하셨다)
#5.
이야기를 쭉 듣자 풀이 죽기는 커녕, 내가 여길 찾아온 핵심 이유가 다시 생각났다.
'마을의 희망, 과연 없을까? 난 그걸 배우러 왔는데'
"수녀님, 제가 생각하고 그렸던 물만골과는 많이 다르네요. 그치만, 제가 궁금한 건 그래도 수녀님이 오랫동안 물만골에 계실 수 있던 희망이라고 보신 것, 힘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아님 앞으로 희망이라 여기고 계신 이유일 수도 있고요."
그러자 연신 미안한 표정으로 부정적인 마을 이야기만 하시던 수녀님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이들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거죠."
예전에 그러지 않았던, 감사할 줄 아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남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아이를 볼 때 그 때가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 사실 기간이 끝나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으셨다는 말씀.
...
아이들이 크게 다투거나 싸움이 벌어졌을 때,
처음 몇 번, 아이들을 모이게 해 다툰 아이들 각자의 심정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서 어떻게 하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지 의논하게끔 자리를 만드셨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이 지나자 이제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그렇게 모여 의논하고 방법을 찾기도 하고
다른 아이를 심하게 따돌리던 아이, 짖궂게 괴롭히던 아이도 덜 그러거나 나중에 친구한테 미안해하는 것을 여러 번 보셨다고 했다.
#6.
최근에 한 번은 수녀님 주무시는 근처 수녀원으로 남매가 한 밤중에 찾아왔다고 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 여동생 이렇게 사는 집인데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가정폭력이 집을 나간 할머니, 어머니를 넘어 여동생한테까지 미치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12살 오빠가 여동생 손을 잡고 왔다는 것이었다.
수녀원은 공부방처럼 따뜻하지도 않아 아이들이 잠시라도 편히 지낼 수나 있을까 싶어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했던 수녀님.
아이들과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려는데 들린 12살 오빠의 목소리.
"아까 많이 무서웠지? 걱정마.. 오빠가 지켜줄게."
...
제일 말썽을 많이 부려 속앓이를 하게 했던 남자 중학생 아이 몇몇이 졸업여행을 가서 써온 수녀님께 드리는 알록달록한 편지지와 편지봉투 안의 삐뚤삐뚤한 글씨.
그 글씨가 적고 있는 말들...
'사랑해요. 저를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녀님.'
...
한 친구가 다리가 부러지자 누가 따로 얘기할 것도 없이 병원이며 집이며 병문안가고 찾아가서 친구를 도와주는 아이들.
...
친구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에 누구보다 먼저 찾아가 일손 거들고 위로하는 아이들.
...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감히 예수님을 사랑하겠냐며, 아이들 섬기고 사랑하는 지금이 바로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라며
10살 때 성경에서 본 '빈자는 행복하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빈자는 내게 가르침과 은총을 주러 온 이들'이라시는 수녀님...
지금 공부방이 학습지도를 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마음 편안하게, 몸 따뜻하게 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그리고 아이들간 유대관계가 자라나서 같은 동네 형, 누나, 오빠, 언니, 동생끼리 서로 잘 챙기고 보살필 수 있는 곳이길 바란다는 말씀.
처음 실무를 맡게 되었을 당시, 전 실무자, 자원교사들과 아이들의 관계도 걱정되고 과연 자신이 이 사람들을 대신할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셨다는 수녀님.
그렇게 고민하며 아이들을 조심스레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은 공부방의 위기라 여겼던 그 때,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꿈꾸고 있는 것을 보셨다는 말씀,
자신이 한 것은 아이들 사랑하고 기다린 것 밖에 없다며 부족한 것은 어떻게든 채워진다시던 수녀님. 돈 걱정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구청, 시청 직원이 법까지 찾아가며 도우려했다 신다. (귀한 뜻, 좋은 뜻이 있는 곳에 선인, 귀인이 있게 마련이나니)
지역아동센터모임이나 실무자모임 나가면 프로젝트, 프로포절, 지원비 따는 이야기를 주로 할 때 그저 자신은 우리 아이들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밖에 할 게 없어 그 자리가 너무 어색하시다는 수녀님.
#7.
부정적인 이야기로 가득하여 환상은 깨지고 기대는 무너지려는 찰나,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믿음으로 여쭌 이야기...
비록 내가 듣기 미안한 이야기로 시작하였으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수녀님이 쏟아내었던 진실된 희망은
아이들의 인격이 자라는 이야기, 부모님과 아이들 사이가 좋아지는 이야기, 아이들 간에 좋은 유대 관계 생기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내가 본 수녀님의 관심은 오로지 이것.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이 서로 잘 지내고, 올바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돌이켜 생각할수록 내가 가야할 시골사회사업가의 핵심소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사회사업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을과 아이들, 어르신을 진정으로 돕는 것일까?'
#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
출처 :살림 일꾼 원문보기▶ 글쓴이 : 이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