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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책

풍요로운 가난

소비에 노예가 된 우리는 항상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진 않는가?

프랑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엠마뉘엘 수녀의 삶을 통해 그녀가 직접 풀어낸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이 책은 어떤이처럼 구호활동을 하나의 낭만적인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의 삶을 불쌍하게 적어놓아 동정심을 받도록 적어놓은 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녀는 프랑스라는 소위 선진국과 카이로의 넝마주의자들이라는 소위 후진국의 사람들을 만나며 적은 이야기이다.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더더욱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단어가 주는 구분과 사용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지 궁금해졌다.

과학기술의 발달, 교육의 체계화, 사회편의시설 등으로 사람이 편리한 삶을 살아가는 나라는 선진국이고, 조금 불편하게 살아가면 후진국일까? 정말 OECD국가에 편입되는 것은 그 나라를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이 책을 한장한장 펴내려 가면서 난 저자가 어렸을 때 부터 가졌던 눈이 개인의 편리함에만 있지 않은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린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동생의 예쁜 침대와 비교하면서 "불공평해!"라고 외치는 것. 사실, 포근한 이불이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 보통의 아이라면 "재 너무 불쌍해."라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 아이는 이미 이불이 주는 따뜻함을 경험했을 테니. 그러나, 그 이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이불이 없다고 해서 불편하다거나 이불을 가진 아이를 보고 불공평함을 느낄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자본의 논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비자본사회의 행복함, 즐거움들에 대해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근데, 조금 궁굼한 부분은 그 사회 혹은 국가가 대체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있거나 혹은 그 자본이 많지 않은 곳의 가난한 사람들과 자본이 많이 있는 나라에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떨지. 그 사람들도 행복할지 궁금해졌다. 어찌보면 어느정도 자본이 있는 상태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본이 주는 편리함을 누리고 사는데, 소수가 그 자본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난해졌다. 라고 가정했을 떄, 자본주의국가에 만연이 드러나는 경쟁에서 밀려난 그 가난한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아직 여러생각들로 복잡한 가운데 한가지 어떤 것에 대한 내 선택의 기준이 될만한 문구를 발
견했다.

"만약 내게 유용하지만 내 가족에게는 해로운 그 무언가를 내가 안다면, 나는 그것을 내 정신으로부터 거부할 것이다. 내 가족에는 유용한데 내 조국에는 그렇지 못한 게 있다면 나는 그걸 잊으려고 애쓸 것이다. 내 조국에는 유용하나 유럽에는 해롭고, 또 유럽에는 유용하나 인류에게 해로운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어길 것이냐."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교황에게 당당히 전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생각하는 대로 삶을 살아가신 엠마뉘엘 수녀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먼저 그렇게 살아가신 분을 보면서 현재 이 사회와 타협하고 싶을 때마다 별난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을 얻게된다.

이 책은 그동안 원조, 가난, 관계, 행복 등에 대한 나의 고민을 가볍게 해 주면서 또 다른 고민들을 하게 했다. 우리나라가 가난했을 때 두레,품앗이 등으로 정답게 살았으나, OECD국가로 들어가게 되면서, 세계경제 X위라는 타이틀에 민감해 지기 지면서 끊임없는 경쟁으로 양육강식을 부르짓는 이 사회에서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국가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과 행복에 대한 생각 또 삶의 질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너무도 많아지고 있는게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가난이라는 단어를 "돈"의 유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질은 돈이 많으면,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면, 편리하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그것들을 계속 구축해 달라는 요구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난 행복은 동물과 식물이 적절하게 어울릴 수 있고 경쟁이 상생을 앞설수 없을 때 높아진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하면 모든 지구촌 특히 인간사회가  만족을 알고, 더불어 함께 행복할 수 있을지 다들 생각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