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른나라살이/필리핀이야기

8호실 사람들 - a clash

필리핀유학시리즈 3



8호실 사람들 - a clash

지~~~~~이~~~~~잉

L의 문자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이 없다.” 컴퓨터 노래방을 함께 즐기지 않아서 그런 건가? 어제처럼 밥 먹고 3시간씩 놀아달라는 건가? 참 사람 피곤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에서 삶을 시작한지 2달째 접어들었다. 그동안 난 제법 이곳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가끔은 선풍기 없이 잠을 자고, 하루일과를 해시계에 따라 시작∙과 마무리를 한다. 주말이면 6시간이나 걸리는 농장을 갈 때에도 경계심 없이 낯선 사람들과 함께 졸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며 지루함을 달랜다. 이곳 언어도 조금씩 들려온다. ‘마간당 우마가, 꾸므스따, 꾸야, 아떼...’ 그러나 단 한 가지. 방식구들과의 공동식사 - 음식과 대화- 는 여전히 힘들다. 공기가 아닌 접시에 쫙 깔은 밥, 음식마다 들어있는 기름기도 부담스럽다. 간혹 농장 사모님께서 김치를 주시지만, 이곳 사람들이 우리의 김치를 너무도 좋아해서 갖고 오는 즉시 없어진다. 그렇다고 공동식사를 하는데 어디에 숨길 곳도 없지 않은가! ‘뭐 굶지 않는 게 어디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래도 내 배는 늘 허기진다. 또 방을 함께 사용한다는 이유로 짧은 영어로 하는 대화를 계속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족한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내게는 엄청난 압박이다. 그렇다! 난 4일은 학교, 3일은 농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엄밀히 말하면 4일과 3일 사이 반나절은 길바닥에 보내고 있다. 그래도 내게는 사막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 목적이 있기에 열악한 환경에서 농장을 만드는 현장을 봐야하고, 또 이론도 공부해야 한다.

지난 밤 문자가 신경 쓰였던지 난 잠을 설쳤다. 내야하는 과제를 준비하느냐고 부엌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바로 책상에 앉았다. L과 그녀의 긴밀한 친구 H가 나를 지나쳐 부엌으로 간다. 그리고 “아니 여기 물이 왜 이렇게 고여 있니? 누가 그런 거니?” 신경질적인 L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뒤를 돌아봤더니 H가 손가락을 펴서 나를 가리키며 신경질 내는 L에게 이야기 한다. “제” 뭔가 했더니 내가 세수를 하면서 주변에 물을 튀었다보다. 심장은 뜨끔했지만, 늘 있던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난 다시 과제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L의 궁시렁은 끝날 줄을 모른다. 아~~진짜~~ “조용히 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난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일주일 째 이런 신경전이 계속 되어간다. 혼자인 나는 말없이 강의실과 도서관만을 오가며 지내는데, 그들은 같은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화통한 웃음을 나눈다. 간혹 눈길이 마주칠 때면 눈인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자신들의 언어로 왠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어쩌면 나는 이 사회에서 매장당할 것 만 같다는 생각에 공부에도 집중이 안된다. 내 옆쪽으로 자리 잡은 P는 우두머리처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니는 L과는 반대로 조용히 자신의 일만 한다. 아직 영어가 어눌해서 대화가 어렵지만, 그나마 그녀는 간간히 따뜻한 미소를 날려준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심리적 압박감속에 지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