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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머컬쳐디자인/들풀이야기

 

 

"피죽도 못먹었어?" 돌피, 피

피죽 한 그릇에 허리 졸라매고 초근목피로 허기진 배 채우던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듯하다'는 속담도 있듯이.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전쟁은 농사를 짓던 사람을 죽게 했고 땅은 초토화되었다. 비축해 둔 식량은 동강이 났다. 전쟁이 끝나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다. 전쟁은 또 생태계를 파괴한다. 그래서 전쟁의 후유증은 상당기간 지속된다. 땅이 회복되어 곡식이 자라 수확하려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전후의 사람들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기도 하고, 척박한 땅에서 나오는 잡초를 뜯어서 끼니를 이어간다.

며칠을 굶주리면 평소에 먹지 않던 풀도 입에 가져가게 마련이다. 보이는 푸릇한 것들은 독이 없는 한 모두 먹을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구황()식물'이다. 피는 그런 구황식물의 상징이다. 피는 논과 밭에서 자라는 잡초다. 나락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벼보다 껑충 커버린 피를 적으로 간주한다.

벼가 먹을 영양분을 피가 다 빼앗아 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8월 뙤약볕 아래서 여름 농활을 하는 동안 논에 들어가 내내 피를 뽑았다. 내가 피를 뽑는 동안, 내 다리에 붙은 거머리는 내 피를 뽑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피가 더 맛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농부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벼보다 '망할 놈의 피'라고 외면당하는 잡초에게 더 많은 애정이 갔다.

피는 오곡() 중 하나로 식용이다. 조선시대 재배면적이 10만ha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대표적 구황작물이지만 산업화와 녹색혁명을 통하는 동안 쌀 자급으로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지리산의 '피아골'이라는 지명도 식용피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만큼 피는 한반도에서 대중적인 작물이었다. 1965년까지만 해도 가축의 사료로 1000ha 정도 재배했지만 지금은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 현재는 미국이나 아프리카에서 재배되며 논과 밭의 잡초로 남아 있다. 피는 중국이 기원지이며, 고대로부터 인도,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서 재배되었다.

논과 밭에서 자라는 것은 돌피다. 잡초로 알려진 돌피는 대체로 밭에서 자라고 1~2미터 키에 꽃은 8~9월에 피며, 까락은 있거나 거의 없다.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생육일수도 100~120일로 짧다. 이 조건이 구황작물로 재배되었던 이유이다. 완숙되면 씨가 땅에 떨어져 저절로 군락을 형성한다. 수확은 80퍼센트 정도 성숙했을 때 한다. 그때 수확해야 씨앗 낭비가 없다. 완전히 익은 뒤에 수확을 하면 움직임으로 인해 씨앗이 땅에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벼와 마찬가지로 피의 주성분은 당질이지만 단백질과 지질의 함량이 쌀보다 높다. 잡곡 중 모양새가 좁쌀과 비슷한 피는 아미노산의 함량이 많아 맛이 구수하고 무기 영양소인 칼륨과 칼슘의 함량이 다른 화본과 작물보다 많다. 말의 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농진청에서는 벼에 밀려난 피를 대량으로 재배할 계획을 세웠다. 영양이 뛰어날 뿐 아니라, 항암과 미백, 항산화 작용에도 효과가 뛰어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특히 기능성 생리활성물질인 '루테오린'과 'N-세로토닌', '트리신' 등이 함유되어 화장품이나 기타 다른 기능성 신소재로 활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지난해 농진청 유전자원센터에서는 일제 때 빼앗겼던 한반도 원산 토종유전자원 1천500여 점을 반환받았다. 그중 식용이 가능한 피 품종인 '수레첨'을 올해 100m2의 면적에서 시험 재배한 농진청은 채종포에서 수확한 씨로 논에 섞여 있는 잡초가 아닌 식용이 가능한 '피' 품종의 대량재배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피의 생육기간이 3개월 정도로 벼보다 짧으며 간척지 등 척박하고 염분이 많은 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생육에 필요한 물 요구량도 적으며 그 사용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제 피가 재배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날이 오나보다. 식용피를 재배한다고 하니, 잡초 피는 잡초대로 살아가겠지. 같은 피인데도 어떤 피는 인간에게 선택되어 작물이 되고, 야생으로 남아 있는 피는 여전히 야생으로 떠돌며 길러진 피보다 더한 향과 맛을 내게 될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우르르 자연산을 찾아나서는 바람에 야생피가 말살되지나 않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이렇게 먹자]

피는 살짝 쪄서 절구로 빻는다. 단백질과 지방이 많아 영양은 높으나 소화율이 나쁜 것이 흠이다. 피는 쌀과 함께 밥을 짓거나 가루로 만들어 떡, 엿을 만든다. 미국, 일본에서는 밀가루와 섞어 빵을 만들기도 한다. 또 된장이나 소주의 원료로도 이용한다. 피의 질이 부드럽고 영양가가 높은 편이어서 일본에서는 피로 빵과 밥, 그리고 국수를 만들어 파는 식당도 있다.

출처: (숲과 들을 접시에 담다(약이 되는 잡초음식), 2011.12.16, 도서출판 들녘)